“평단 낮추면 금방 원금 회복돼.”
이 말은 위로 같았고, 기회처럼 들렸다.
나는 다시 매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계좌는 점점 붉어지고,
회복은커녕 손실만 깊어졌다.
물타기, 그건 희망을 가장한 지옥 입장권이었다.
1. 시작은 단순했다: ‘좋은 주식이니까 더 싸게 사면 된다’
나는 평소 반도체에 관심이 많았다.
뉴스에서는 매년 ‘반도체 수퍼사이클’을 외쳤고,
전문가들은 ‘지금이 저점’이라고 말했다.
그중 A전자라는 중견 반도체 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주가가 18,000원에서 12,000원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 정도면 바닥 아니야?"
나는 12,000원에 100주를 샀다. 총 120만 원.
며칠 후, 주가는 10,800원까지 하락했다.
마이너스 10%.
그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이럴 때 더 사서 평단 낮추면 수익 전환이 빨라진다.”
‘그래, 나중에 12,000원만 가도 본전인데’
나는 10,800원에 100주를 더 샀다.
총 보유량 200주, 평단은 11,400원이 됐다.
2. 물타기의 미끄러운 경사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주가는 10,000원, 9,200원, 8,800원…
계속해서 떨어졌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 진짜 저점일 수도 있어.
더 사면 평단은 10,000원 아래로 내려갈 거야.’
그리고 또 매수.
8,800원에 200주 추가.
총 400주, 평단가는 10,200원.
그때쯤 이미 투자금은 400만 원이 넘었다.
하지만 주가는 멈추지 않았다.
7,600원, 7,100원…
평단에 닿기는커녕,
주가와 평단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3. ‘합리화’라는 이름의 착각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 “기업 실적은 나쁘지 않다.”
- “매출은 전년 대비 증가했다.”
- “뉴스에서 기관도 매수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데이터를 보면
-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반토막
- 재무구조는 악화
- 대규모 전환사채 물량 대기 중
즉, 나는 이미 숫자가 아닌
희망을 근거로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 심리학에서 이걸 확증 편향이라고 한다.
자신의 믿음을 지지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것.
나는 스스로의 확증 편향 속에서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4. 물타기의 구조적 위험
물타기는 단가를 낮춰 수익 전환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 12,000원에 100주 매수 → 120만 원
- 10,000원에 100주 추가 → 100만 원
- 평단: 11,000원
→ 주가가 10,000원으로 하락 시
평균 손실률은 -9%,
투자금은 220만 원.
그런데 주가가 8,000원이 되면?
평균 손실률은 -27%,
손실액은 59.4만 원.
손실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진다.
물타기의 가장 큰 문제는
추가 매수할수록 손실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하락장에서 자금이 묶여
기회비용까지 발생한다.
5. 물타기 대신 해야 했던 것들
나중에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알게 됐다.
물타기는 전략이 아니라 심리적 반응일 뿐이라는 것.
진짜 투자자는
- 손절 시점을 정하고 지킨다.
- 주가가 빠지는 이유를 분석하고 대응한다.
- 추가 매수 전 시장 구조와 기업 펀더멘털을 본다.
- 한 종목에 자금을 몰빵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했던 것은
더 사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추고 다시 판단하는 것이었다.
경제 개념 정리: 물타기란?
물타기는
하락한 주식을 더 매수해 평균 단가를 낮추는 투자 방법이다.
영어로는 averaging down이라고 부른다.
예시:
- 10,000원에 100주 매수 → 총 100만 원
- 8,000원에 100주 추가 매수 → 총 80만 원
→ 총 200주, 평균 단가는 9,000원
장점:
- 주가가 반등하면 빠르게 수익 전환 가능
단점:
- 계속 하락하면 손실폭이 커지고
- 자금이 묶여 회복 불가능해질 수 있음
- 감정적인 매매가 되기 쉽다
전략적 물타기는 가능하지만,
무계획적 물타기는 계좌를 붕괴시키는 지름길이다.
마무리 하며
물타기를 하면서 나는
계좌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더 깊은 구덩이로 밀었다.
평단은 낮아졌지만,
계좌는 더 무거워졌고,
심리는 더 흔들렸다.
이제 나는 안다.
싸졌다고 싸게 산 게 아니고,
더 큰 손실을 미리 당긴 것일 뿐이라는 것을.
투자에서 가장 어려운 건
손해를 인정하고 멈추는 용기다.
물타기는 그 용기를 미루는 핑계였을지도 모른다.